
─ '특촬 HL 1일 전력'에 올라온 '거짓말'과 진단메이커의 결과(https://kr.shindanmaker.com/744259)를 주제로 쓴 글입니다. 가면라이더 포제의 일부 스포일러와 캐릭터 붕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전편은 https://inopina.tistory.com/54
토모코의 어두운 표정에 류세이는 멈칫했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 토모코의 목소리는 누가 봐도 애써 밝은 척을 하려는 목소리였다. 표정도, 어깨도 축 처져 있었다. 유우키와 제이크가 무슨 일이냐고 다가가 물었다. 토모코는 괜찮다고 웃다가 류세이를 바라봤다. 류세이는 시선을 피했다. 유우키와 제이크의 시선이 류세이 쪽으로 다가왔다.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아무 일 없었어요."
"……응. 아무 일 없었어."
류세이는 어제 일을 떠올렸다. 토모코가 급하게 3학년 B반에 뛰어와놓고는 편지를 읽는 류세이를 보자마자 돌아가버렸다. 내가 다른 사람이 준 러브레터를 읽어서겠지. 류세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겐타로는 류세이에게 온 편지를 보자마자 켄고처럼 편지를 버리지 말고─그 말을 들은 켄고는 왜 또 그때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화를 냈다.─끝까지 읽어서 답을 돌려주라고 했다.
처음부터 그럴 참이었는데 말이야. 류세이는 책을 읽는 토모코의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처음 고백받은 건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첫 러브레터를 받았을 때는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게, 류세이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연심을 품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감이 없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복을 입었을 때 류세이는 자기가 나름 잘생겼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고, 1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서도 꽤 괜찮은 성적을 받았다. 그건 그거고, 고백받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 류세이는 그 정도로 생각했다.
그 이후로 고백받는 일이 차츰 늘어나고 신발장이나 사물함에 편지와 선물이 쌓일수록 류세이는 무뎌졌다. 얼굴을 아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름도, 모습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고백받는 일에 두근거리고 신기해하던 건 옛날 이야기였다. 제대로 대화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하는 사랑이 정말로 사랑인 걸까. 내 진짜 모습을─우습게도 류세이는 '진짜 모습'이란 게 무엇인지 정작 알지 못했다.─보게 되면 실망하는 건 아닐까. 들어오는 고백을 모두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류세이는 늘 그 생각을 꼬리표처럼 달아두었다.
"웃고 싶지 않으면 웃지 않아도 돼요."
그렇게 말해준 건 네가 처음이었어. 류세이는 회상했다. 반 조디아츠 동맹의 지시를 받은 스파이로서 아마노가와에 잠입했을 때, 그러니까 류세이가 모두에게 정체를 숨기고 있을 적에 토모코가 한 말이었다. 류세이는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래빗해치에 들어가자마자 아이패드를 들고 선 토모코와 마주쳤고, 습관처럼 웃자 토모코가 그렇게 말했다. 단둘이 있었기에 류세이의 눈치를 보거나 토모코를 말려줄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바로 정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반가워서 웃은 건데."
"……거짓말. '왜 하필 만나도 널 만나냐.' 그런 생각 하셨잖아요?"
류세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 생각, 안 한 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생길 게 불 보듯 뻔한데 그 누가 반기겠는가. 그러나 류세이는 토모코에게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아니라고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의 래빗해치 정찰 계획은 영 글렀다. 그렇게 숙제라도 하려고 가방을 뒤적이는 류세이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토모코가 앉은 자리로 향했다.
"웃고 싶지 않으면 정말 웃지 않아도 돼?"
약재를 작은 절구에 넣고 방망이로 찧던 토모코가 뒤를 돌아봤다. 류세이는 순간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으나 실수한 티를 내면 오히려 마이너스라는 걸 알았기에 작게 웃기만 했다. 토모코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다시 절구로 시선을 옮겼다.
"저한테 물어보셔도…… 웃을지 안 웃을지는 류세이 선배 마음이잖아요."
"그건 알지만, 예의상이라는 게 있잖아. 그리고 나는 웃고 싶어서 웃었는걸. 반가운 사람을 만났잖아?"
그 말에 토모코가 뚱한 반응을 보였고, 류세이는 팔짱을 끼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지. 마녀니까 등 뒤에도 눈이 달렸을지도 몰라. 류세이는 억지로 웃었다. 한참 방망이로 약재를 짓이기던 토모코가 깊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다시 돌렸다.
"물길이 막혀있어요."
"뭐?"
"류세이 선배를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고요. 아주 맑은 강의 물길을 억지로 막아놓은 것 같아요. ……그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는 썩는다고?"
류세이는 목소리를 잔뜩 가라앉히며 물었다. 토모코는 류세이의 태도에 놀란 것인지 움찔거렸고, 류세이는 곧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토모코에게 적의를 보이고 말았다. 앞머리를 정리하며 애써 진정해보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앞머리는 정리되기는커녕 헝클어지기만 했고, 진정시키려던 마음은 심란해지고 말았다. 평정심이 흐트러지니 그 자리에 자연스레 반발심이 생겼다.
네가 도대체 뭘 안다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뭣 때문에 이런 짓까지 해가면서 싸우는지, 아니 그전에 내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왜 다 안다는 듯이 쳐다보는 거야. 꾹꾹 눌러담은 말이 닫힌 입 바로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때까지도 토모코는 류세이를 응시했다. 토모코의 까만 눈동자에 류세이는 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먹칠을 한 것처럼 머릿속 문장들은 흐지부지 사라졌다.
"……제 생각은 그렇지만, 죄송해요. 신경쓰지 마세요."
"아니야. 괜찮아."
그렇게 류세이는 등을 돌리고 말았다. 이상하게 모진 말을 꺼내려고 하면 할수록 가슴이 찔렸다. 아파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데. 한동안 류세이는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잠깐만, 토모코! 같이 가!"
류세이는 숨을 몰아쉬며, 돌아선 토모코 앞에 섰다.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던 류세이는 고개를 들어 굳은 토모코의 얼굴을 바라봤다. 래빗해치에 있을 때와 똑같이 어두웠다. 토모코는 굼뜨게 눈을 깜빡이더니 왜 그러냐고 물었다.
"왜냐니. 같이 하교하기로 했잖아. 혹시 오늘도 약속 있어?"
"……아니요. 없어요."
"그럼 같이 가자. 오늘 날도 좋고, 다행이다."
신나서 하늘을 보며 떠들던 류세이가 문득 토모코를 바라봤다. 토모코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분명 또 어제 일 때문이겠지. 류세이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편지를 그대로 줬더라면, 그랬더라면 토모코한테 나도 널 좋아한다는 답을 돌려줬을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류세이가 눈치채지 못했으면 편지는 그대로 소각장에서 불타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남의 손에 들어가서 군것질거리가 됐을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류세이는 아찔했다. 류세이는 왜 그 편지를 내게 주지 않았냐고 물으려다가 혀를 깨물고 참았다.
"어제 양호실 다녀왔댔잖아. 켄고는 좀 괜찮대?"
"네?"
토모코의 목소리가 떨렸다. 놀라 류세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류세이의 눈길을 피했다. 토모코는 가려다가 중간에 급한 일이 생겨서 가지 못했다고 했다. 음, 그래. 류세이에게서 떠름한 대답이 돌아왔고, 토모코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치마 끝을 손으로 세게 움켜쥐기도 했다. 변명할 생각도, 도망칠 생각도 들지 않았는지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한 토모코가 잠시 뒤에 입을 열었다.
"류세이 선배, 고백 편지에 답장은 했어요?"
"응."
"……그렇구나. 축하드려요. 사귀게 된 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답장을 줬다고 했지, 사귀기로 했다는 말은 안 한 걸로 기억하는데."
류세이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다소 비딱하게 섰다. 토모코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류세이는 반대편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는 못을 박았다.
"다 거절했다고."
"왜요?"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저희 반에서 제일 멋진 애도, 3학년 치어리더부 선배도 류세이 선배한테 고백한 것 같… 아."
그걸 알아봤나?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있던 류세이의 표정이 돌연 풀렸다. 역시 신경 쓴 건가. 일순간 류세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죄, 죄송해요. 일부러 알아보려던 건 아니고 어쩌다가 알게 된 건데……."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아무튼, 잘나고 잘생겼다고 무조건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잖아?"
토모코가 류세이를 힐끔 쳐다봤다. 류세이는 얼른 입을 손등으로 가렸다. 설마 토모코는 날 잘나고 잘생긴 사람으로 생각하는 건가? 직전까지 품었던 모난 마음이 금세 둥글둥글해졌다. 얼굴에 티가 날까 싶어─류세이는 몰랐지만, 이미 티가 나는 상태였다.─헛기침을 한 번 하고 류세이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제대로 다 답 돌려줬어. 용기를 내준 거니까. 익명으로 온 편지 제외하고."
토모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류세이는 갈팡질팡하는 토모코의 눈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언제나 피하기만 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피하는 쪽은 토모코가 되었다.
"……거절당할까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닐까요."
"거절 안 할지 어떻게 알아."
"희망고문 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요. ……류세이 선배는 그런 감정 모르시겠지만."
"아닌데. 아는데."
류세이는 한 발 앞으로 가 토모코와 가까워졌다. 토모코 위로 류세이의 그림자가 얹어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토모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류세이를 바라봤다. 진지하게 토모코를 응시하던 류세이는 작게 웃으며 이제 돌아가자고 했다. 웃고 싶지 않으면 웃지 않아도 된다는 토모코의 말이 자꾸만 귀에 맴돌았다. 하지만 류세이는 웃었다. 토모코만 보면 슬프고 아파도 웃음이 나는 통에, 웃지 않을 수가 없어서였다.
사랑에 빠진 걸 자각하면 끝이라고들 하잖아. 그래, 맞아. 그 말대로 모두 끝났어, 토모코. 보내지 않을 편진데 하고 싶었던 말 좀 하자. 나 너 좋아해. 좋아하는 거 맞아. 근데 끝까지 아닌 척할 거니까 너도 눈치 없는 척 좀 그만해. ……그렇게는 말해도 끝까지 숨기지 못할 거야. 네가 그 누구보다 눈치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아닌 척할 수가 없거든.
있잖아. 네가 들으면 우스워할 걸 알지만, 네가 버린 편지 실은 내가 주웠어. 구겨져 있더라. 네가 구겼겠지? 그런데 그걸 보니까 꼭 내가 편지를 짓밟은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더라.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몇 번이고 폈어. 펴서, 다시 닳고 닳을 때까지 읽었어. 아니 사실 지금도 읽고 있어. 내가 지금까지 받아본 편지 중에서 가장 떨리고 사랑스러운 편지였어.
그리고 그거 알아? 네 편지, 지금은 보물상자 안에 있어. 보물상자라고 하긴 거창하고, 그냥 예쁜 상자야. 사실 그런 걸 내 방에 들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읽다 보니까 남겨두고 싶더라고. 여기서 더 구겨지거나 썩으면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래서 잘 넣어뒀어. 유우키가 준 페어 티켓이랑 같이 말이야.
이렇게 하는 데도 너는 모르겠지. 어쩌면 영원히 말이야. 그러니까 이 편지는, 네가 준 편지의 답장은 주지 않을 거야. 네가 내 마음을 알아줄 때까지. 그러니까 내 마음속이 아니라, 너만을 바라보는 내 눈동자를 봐줘. 부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