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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가면라이더크오합작 으로 쓴 단편입니다. 합작 페이지는 이쪽입니다. 

https://tokusatsucrossover.creatorlink.net/

 


두 명의 마녀

 

 

※ 영화 <마녀>(2018) 측 등장인물 국적상 <가면라이더 포제>는 로컬 설정으로 진행했습니다.

※ <가면라이더 포제> 및 <마녀(2018)>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또한, <가면라이더 포제>의 극장판 스포일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살인, 폭력에 관한 묘사가 일부 존재합니다. 감상에 유의 부탁드립니다.

 

 

인간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아니 사람은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 꺾이고 무너져도 걸을 수 있을까? 자윤은 어두운 도로를 걸어가며 되새겼다. 인간이 아니어도 더 갈 수 있나? 애초에 나 같은 마녀도 인간이 할 수 있나? 자윤의 옆으로 차 여러 대가 이따금 지나갔지만, 자윤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고, 도움을 바라지도 않았다. 저 사람들에겐 목적지가 있지만, 그 목적지가 자윤이 바라는 목적지는 아닐 터였다. 자윤은 그저 일정한 속도로 걷기만 하면서 발이 닿는 곳에 무언가 조그마한 단서가 있기를,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 또 시작인가.’

도시가 가까워지자 멎을 줄만 알았던 두통이 또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윤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현기증을 떨쳐냈다. 마지막으로 약을 투여한 지 아직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약을 맞지 않으면 한 달 내에 뇌의 파괴 속도가 두 배로 빨리 증가한다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자윤은 가물거리는 눈을 크게 뜨며 도로에서 시내로 진입했다. 인도로 걷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밤과 새벽의 사이, 자윤은 몽유병 환자처럼 비틀거리며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자윤은 파리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이상하다. 왜 저런 눈으로 날 보는 거지. 나를 아나? 자윤은 눈을 부릅뜨고 여자를 바라봤지만, 여자의 얼굴은 번져 보였고, 여자의 목소리는 자음과 모음이 나뉘어 마치 쇠를 무언가로 긁는 듯한 기괴한 소음으로 들렸다. 괜히 평범한 인간에게 얽혔다가는, 이 사람도 위험해지고 자신도 위험해질 것이다. 자윤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으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하지만 자윤은 본인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고, 시야가 쳇바퀴처럼 굴러가기 시작하자 더는 중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자윤아.

안녕, 작은 마녀 아가씨.

구자윤!

여러 목소리가 섞여 귀에 박혔다. 어느 것이든 딱 하나만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아직 아니야. 아직은. 자윤은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유성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침대에 누운 소녀를 바라봤다. 유성의 옆에는 소녀의 손을 꼭 잡은 유정이 보였다. 유성은 말없이 소녀를 바라보다 마른세수를 했다. 자다가 깨니 웬일로 유정이 새벽에 나갔기에 어리둥절했는데, 모르는 여자아이를 데려오지를 않나. 게다가 유정은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소녀를 병원에 데려갈 수는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유성이 이유를 묻자 유정은 침착하게 답했다.

“병원은 안 된댔어요.”

“뭐?”

“이 아이가, 기절하기 전에 병원에 자기를 데려가지 말라고 해서…… 그래서 여기로 데려왔는데.”

유정은 은근히 유성의 눈치를 봤다. 새벽 댓바람부터 나가서 사람을 걱정하게 해놓고 고양이나 강아지를 주워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주워오다니. 게다가 다친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지 말아달라니. 물론 유성의 동료 중 의료계에서 종사하는 이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다. 유성은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 누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 아이, 어떻게 할 거야?”

“네?”

“신상 정보나 가족의 소재 여부는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지금 당장 찾아달라고 할 수도 있지만, 네가 부탁했으니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고.”

유성은 팔짱을 끼고 유정을 돌아봤다. 유정은 움찔했다. 병원에 데려가지 말라는 말이 왠지 간곡한 부탁으로 들렸고, 소녀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운을 느꼈기에 우선 집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유성이 놀랄 만한 일을 저질렀기에─안 그래도 유성은 유정에게 혹여나 안 좋은 일이나 사고가 닥칠까 노심초사했다.─유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대신 유정은 수건에 물을 다시 묻혀 땀방울이 맺힌 소녀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그런 유정의 모습을 보고, 유성은 한숨을 푹 쉬더니 유정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유정아.”

“알아요. 제가 걱정되어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 저한테 화내려고 그러시는 것도 아니라는 거.”

유정은 소녀를 응시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 건지, 눈꺼풀 밑으로 눈알이 빠르게 움직였다. 고통을 참으려는 듯 신음을 내면서도 입은 절대로 열지 않았다. 유성은 시선을 소녀에게로 옮기며 침묵했다.

“무시할 수가 없었어요, 선배.”

유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아이의 눈빛,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어요.”

유정은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유성은 유정을 돌아봤다. 어느 한구석에 눈을 둔 채로, 유정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도움을 구하면서도 더 다가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에서 유정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눈이 충혈된 채로 자신을 노려보는 어린 맹수를 유정은 차마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유성은 곤란한 낯으로 턱을 쓰다듬다 손을 무릎 위에 모았다.

“널 상처 입힌 애인데도?”

유성이 유정의 오른 손목을 가리키자, 유정은 아… 하며 소리를 내뱉었다. 손목에는 손자국과 함께 멍이 들어있었다. 유정은 얼른 소매를 내려 손자국을 숨겼다. 유정아. 유성의 부름에도 유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맞아. 네 말대로 너한테 화내려는 거 아니야. 그냥 나는…… 걱정돼서 그래. 물론 우린 이제 고등학생이 아니라 어른이고, 내가 없을 때도 네가 모든 걸 잘 해내고 있단 사실도 알아. 그래. 잘 알아. 하지만 유정아…….”

유성도, 유정도 뒤에 나올 말을 알았다. 네가 잘못되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소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소녀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일상에서 내뱉지 않았던 불안감은 유정이 소녀를 데려옴으로써 증폭되었다. 입에 담지 않은 말은 메아리처럼, 그리고 동시에 소리 없는 무전처럼 전달되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저 아이가 붙잡았어요. 쓰러지기 직전에.”

유정이 손목을 매만지며 답했다. 중심을 잡기 위해 그랬으리라. 하지만 소녀의 힘은 또래 아이의 평균적인 힘보다 훨씬 강했다. 만약 소녀에게 조금 더 의식이 있었더라면, 손목이 부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성이 그렇게도 경계하는 이유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손목을 주무르던 유정을 보고 유성이 손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대신 손목을 주물러주었다.

“이따 파스 붙이자. 알겠지?”

“네.”

“아침은 내가 할게. 3인분으로 해야 하나.”

유성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유정은 은은하게 웃었다. 결국, 또 유성이 유정에게 져줬다.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유정은 잠자코 방을 나가는 유성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구자윤이라. 구자윤. 이젠 다시 못 돌아갈 텐데. 너 계속 그러고 살고 싶은 거야? 솔직히 나 같음, 그냥 구자윤으로 죽었을 거야.

아니, 난 살 거야. 구자윤으로 계속 살 거라고.

자윤은 귀공자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걸레짝이 되어도 살아있는 게 참 뭣 같지 않냐고 묻던 그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자윤은 환하게 웃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참으로 쉬웠다. 이렇게, 손가락을 조금 움직여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죽는다. 사람을 과녁이라 생각하면 편했다. 그건, 연구소에서 2세대 아이들을 길들인 방식이었다.

눈앞에 있는 것들은 전부 적이다. ‘마녀’는 그렇게 배워왔다.

“아니야, 자윤아.”

“아가…….”

“이 년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자윤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연구소에 있어서 안 될 이들이 있었다. 아버지, 엄마, 명희야. 당황한 자윤은 권총을 떨궜고 귀공자의 웃음소리에 곧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개수작이야.”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개-수작이라니. 하하하. 그래서 이 오라버니가 그랬잖아. 넌 절대로 평범해질 수 없다고.”

“……아니야.”

복수만 끝나면 다시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갈 거다. 그곳엔 부모님이 있을 거고, 가끔 동네 사람들이나 친구들도 놀러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구자윤으로 살아갈 거야. 자윤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내 이름은 구자윤. 자윤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나만의 이름.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이름. 내가 인간이라는 증거. 내게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일상을 보낼 자격이 있다는 표식.

귀공자는 끝까지 원하는 정보를 주지 않을 것이다. 자윤은 무표정하게 방아쇠를 당겼고, 자신을 바라보는 가족과 친구를 등지고 걸어갔다. 미스터 최가, 닥터 백이, 긴머리가 누워 있었다. 자윤은 장애물을 뛰어넘듯 그들을 넘어 걸어갔다. 아직 몸은 움직일 수 있었는데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나는 구자윤이자 마녀. 자윤은 다시금 중얼거렸다.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없었다. 또 둘 중 하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름도 호칭도 실험체 고유숫자도 원해서 갖게 된 게 아니었다. 오직 복수와 생존 욕구만이 자윤이 살아가며 스스로 얻은 것이었다.

자윤은 하염없이 걸었다. 연구소는 터지지 않았고, 아는 이들이 그곳에 아직도 남아있을지는 알지 못했지만, 자윤은 그들을 버려두고 걸었다. 아니 버린 게 아니었다. 그들과 재회를 약속했다. 심성 곱고 웃을 때 다정한, 엄마를 마지막으로 보고.

“엄마.”

자윤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발걸음을 옮기며 혼잣말을 했다.

 

 

“…….”

꿈이란 건 진즉에 알았지만, 그보다도 낯선 곳에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자윤은 제 이마 위에 있는 물수건을 잡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봤다.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크기의 침대에, 수납장과 장식품 따위가 있었다. 자윤은 미간을 손가락을 세게 누르다가 팔에 링거가 꽂혀있는 것을 보았다. 링거는 어디서 급조한 것 같은 막대기에 꽂혀있었다.

자윤은 얼른 시야를 확장했다. 이 상태에서 투시를 하는 건 무모했지만, 다행히도 방문이 조금 열려 있어 그 틈을 통해서 바깥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틈이 극히 작은 탓에 거실 일부만 볼 수 있었다.

‘가정집인가.’

길바닥도 아니고 어쩌다 가정집에. 자윤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쩌면 가정집이 아니라 가정집처럼 꾸민 연구소의 감옥일 수도 있었다. 닥터 백이 그렇게 입이 닳도록 말하던 본사 측의 인간들이 벌였다고 가정하면, 아예 억지라고는 할 수 없었다. 자윤은 나갈까 말까 한참 고민하다 방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염력으로 방문을 잠가버렸다.

“저, 저기. 깨어났니?”

문고리를 몇 번이고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들으니 상대는 여자인 듯했다. 잠깐. 여자? 자윤은 자신이 쓰러지기 전에 들은 목소리도 그 목소리와 흡사하다는 걸 떠올렸다. 도대체 왜? 자윤은 우선 숨을 죽이고 염력으로 서랍을 열어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꺼냈다.

“깼구나.”

여자는 침착하려고 애를 쓰는 듯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고, 이윽고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널 해치려는 건 아니야.”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믿지 못하겠다면, 나는 멀리 있을게. 음, 부엌에 있을 테니까 우선 물부터 마시고 만약 괜찮으면 나한테 말해줘. 혼자 먹고 싶으면 문 앞에 둘게.”

“유정아. 우리 집인 데다가 심지어 저기는 우리 자는 안방인데 주인인 우리가 문 열어달라고 요구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유성 선배, 쉿.”

이번에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름 작게 말하려고 애쓴 듯했지만, 최소한이라도 확장한 오감은 그 정도의 소리는 포착해냈다. 다행히도 자윤의 불안과는 달리 평범한 가정인 듯했다. 연기하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연기에서 자윤을 이길 자는 없었다. 그랬기에 모두를 속이고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다.

자윤은 침을 삼켰다. 방심을 타고 두통이 다시 찾아들었다. 신음을 흘리며 자윤은 엎드리듯 앉았고, 흐느꼈다. 다행히도 가방은 자윤의 옆에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끌어 제 옆에 두었다. 손에 땀이 차 지퍼가 잘 열리지 않아 몇 번이나 지퍼를 집고 옆으로 당겨야 했다. 지퍼가 열린 후에, 자윤은 안을 뒤적여 주사기와 약물이 든 긴 원통형 케이스를 꺼냈다. 주사기의 바늘 부분에 있던 뚜껑을 따고 케이스의 주둥이에 찌른 다음에는 주사기에 약물이 들어갈 수 있게 했다.

그런 후에 자윤은 망설임 없이 주사기를 제 목에 꽂아 넣었다. 약물을 주입하자 머릿속이 맑아지며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자윤은 가쁜 숨을 내쉬고는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았다. 땀을 닦아내자 물을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물을 마시려면 문을 열어야 했다. 자윤은 고개를 돌려 침실과 이어진 화장실을 바라봤다. 세면대에서 수돗물을 받아 마시면 되긴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윤은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이 집이 고층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해도 우선 창문 크기가 충분치 않았고, 이런 몸 상태로 뛰어내려서 무사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으며 괜히 사람들의 시선만 끌게 될 터였다. 이 집에서 나가려면 문을 열고 나가야만 했다. 쯧, 하고 혀를 찬 뒤에 자윤은 수액이 전부 다 떨어진 것을 보고는 바늘을 억지로 빼냈다. 아직 몸을 회복시킬 정도의 체력은 남은 모양이었다. 회복에 신경을 집중시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늘이 빠진 살갗이 아물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뒤 자윤은 좀 더 자세히 방을 살폈다. 방은 전체적으로 깔끔해 보였으며, 이 집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짐작하기로는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의 모습이 담긴 액자가 있었다. 자윤은 그 액자를 유심히 살폈다. 데이트 중 찍은 것인지, 아니면 신혼여행 때 찍은 사진인지는 알 수 없었고, 또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두 사람이 굉장히 친밀한 관계인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시시해. 자윤은 액자를 내려놓고 문 앞에 섰다. 혹시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바로 전투태세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근육을 긴장시켰다. 만약 공격이 들어온다면 우선 상대의 손목을 꺾을 수 있게 말이다.

찰칵, 잠긴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자윤은 문을 열었다. 무언가 있는 것 같아 발을 멈췄다. 밑을 내려다보니 작은 쟁반과 찻잔이 있었다. 찻잔 안에는 물이 들어있었다. 자윤은 잔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잔에 입을 댔다. 웬만한 독이라도 견딜 수 있었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내가 그 사람들을 믿는 건가, 설마. 적일지도 모르는데. 물을 마시면서도 자윤은 경계심이 풀어진 자신을 책했다. 다행히도 물은 차갑기만 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방을 나온 자윤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두리번거렸다. 자윤이 나온 침실은 2층에 있는 듯했다. 저 끝에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침실을 나오자마자 있는 작은 거실에는 푹신해 보이는 하늘색 2인용 빈백 소파가 있었고, 그 앞에는 다리가 짧은 테이블이 있었다. 그 주위로는 휴대용 빔프로젝터와 미니 냉장고 따위가 있었다.

자윤이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실 오른쪽에는 다른 방이 있었는데, 문이 닫혀서 안을 볼 수 없었다. 남의 집을 구경할 마음은 없었기에 자윤은 가방을 가지고 1층으로 내려왔다.

“복층 아파트인가?”

창밖을 내다봤던 것을 떠올렸다. 층수가 꽤 높았던 것으로 보아 아파트인 듯했는데, 복층이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꽤 재산이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1층 거실에서 곧장 현관으로 가려다 식탁 앞에서 그릇을 들고 있는 선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남자는 밥그릇과 반찬을 내려놓으려다 자윤을 보고 멈칫한 것 같았고, 맞은편 의자에는 좀 전에 물을 주고 떠났던 여자로 보이는 이가 있었다. 자윤을 본 여자 역시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일어섰다.

“아니야. 유정아. 내가 할게. 이봐, 밥 먹으려고 내려온 거 맞지?”

남자가 그릇을 내려놓고 여자에게 앉으라며 손짓했다. 자윤은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자기가 이 둘에게 내보이는 경계의 눈빛을 남자도 똑같이 했다. 여자, 유정은 남자와 자윤을 번갈아보다가 도로 앉았다. 남자는 앞치마에 손을 쓱 닦고는 다시 부엌으로 갔다.

“난 먹는다고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자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먹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솔직히 말해 며칠간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은 게 고작이었다. 갓 지은 밥 냄새를 맡으니 급격하게 허기가 졌다. 아, 진짜 나도 한국인이라는 건가. 자윤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도. 몸이 아프면 뭐든지 먹어야 빨리 낫는 법이라잖아. 와서 앉아.”

“밥해준 사람 섭섭하게 하지 말고 앉지 그래? 독 같은 거 안 탔으니까 먹어.”

“유성 선배……. 말을 그렇게 하면 어떡해요. 우리보다 어려 보이는데.”

유성은 유정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도 잠시, 유성은 자윤의 앞에 있는 자리 근처에 밥그릇과 숟가락, 그리고 젓가락을 놔주었다. 자윤은 헛기침하면서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날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뭐야.”

유성과 유정은 숟가락을 들다 멈칫했다. 자윤은 둘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공격성이 느껴지진 않았다. 인간의 공격성이라면, 애초에 파괴적인 공격성을 지니도록 태어나고 자라오며 훈련받은 자윤이 가장 잘 알았다. 이들이 자신을 공격할 가능성보다 공격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자윤은 판단했다. 물론, ‘지금’은 말이다.

“그게…….”

유정이 입을 열자, 유성이 제지하려고 손을 들었다. 유정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유성이 유정 대신 말을 꺼냈다.

“이 사람은 널 구해준 사람이야.”

“감사하다는 반응을 바라는 거야?”

“아니. 유정이는 그런 걸 바라고 널 데리고 온 게 아니야. 아무래도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은데, 유정이를 붙잡은 건 너야. 네가 구해달라는 신호를 보냈으니 유정이가 집으로 널 데려온 거고.”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뭐, 직접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나는 모르는 일이고. 네가 유정이한테 병원으로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해서 병원 대신 이곳으로 데리고 왔대.”

유성이 유정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유정은 유성을 바라보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파 보여서. 그래서 데려왔어. 널 해치려거나 그런 의도는 없었어. 놀랐지? 미안해.”

유정은 특유의 부드럽고 느린 말투로 자윤을 달랬다. 자윤은 헛웃음을 지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사과해야 할 건 이쪽인데 왜 ‘구해준’ 사람이 사과하는 건지. 자윤은 유정에게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밥을 먹었다. 유성이라는 자가 만든 밥인 듯했는데, 그리 나쁘진 않았다. 아직 요리는 조금 낯선 듯 탄 맛이 느껴지거나 짠맛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면 못하는 건가. 자윤은 중얼거리다 무심하게 고개를 들었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두 사람을 보고는 사레들린 기침을 하고 말았다.

“미, 미안. 괜찮아? 유성 선배, 얼른 물 좀.”

“어, 알았어. 여기 물.”

유성이 물을 따라 자윤에게 내밀었다. 음식을 볼이 빵빵하도록─자윤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유성과 유정이 보기에는 자윤의 모습이 볼에 먹을 것을 저장해두는 햄스터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넣은 입에 자윤이 급히 물을 들이켰다. 유정은 어쩔 줄 몰라하며 넌지시 체하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다.

“고, 고맙습, 고마워.”

“놀랐잖아. 몇 끼 굶기라도 한 거야?”

유성의 질문에 자윤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둘은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유성이나 유정이나 자윤의 눈치를 보는 듯,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것과 반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는 건 자윤도 마찬가지였다. 꼭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된 것만 같았다. 비단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크흠. 그래서 맛은 어때?”

“그럭…… 저럭.”

“뭐? 그럭저럭? 유정아. 넌 어때?”

“맛있어요. 점점 실력이 느시는 걸요, 선배?”

“정말? 조금 태운 것 같아서 걱정됐는데. 다행이다.”

역시나. 내가 억지로 끼어든 거잖아. 자윤은 입에 꾸역꾸역 반찬과 밥을 욱여넣었다. 여러 면에서 이곳에서 빠져주는 것이 상책이었다. 칭찬에 행복한 얼굴로 유정을 바라보던 유성이 고개를 돌렸다.

“맞아. 그나저나 너, 이름이 뭐야? 아, 미리 말해두는 건데 가방은 안 뒤졌어.”

“……’마녀’.”

밥알을 꼭꼭 씹어 삼키고 나서야 자윤은 입을 열었다. 마녀가 이름이라고 한 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험체였을 때 공식적으로 받은 이름이라 할 법한 것은 실험체 코드밖에 없었으며, 그밖에 불리던 ‘마녀’라는 호칭은 몇 연구원들과 또래 실험체들에게 불리던 별명 같은 거였으니까. 연구소에서 도망쳐 평범한 가정집으로 들어갔을 때에서야 자윤은 ‘자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자윤은 두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이들에게 가졌던 적의나 경계심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말해줄 수 없었다. 자기와 엮였던 이들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질릴 정도로 자윤은 잘 알았고, 둘에게 ‘자윤’이라는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자윤은 둘에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헤프닝이기를 바랐지, 재앙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저 두 사람은 개구리고, 자윤은 그들을 죽일 수 있는 돌덩이였다. 사람이 돌을 집어 던지든, 아니면 아주 강한 바람이 불어 돌을 움직이든지 간에 개구리는 돌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피해 간다면 천운이겠지. 자윤은 생각했다.

“…지금 농담하는 거지?”

“마녀…….”

유정이 마녀란 단어에 눈을 빛내며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았다. 유성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무언가 추궁하려다 유정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정아. 마녀란 말에 반응하는 이유는 잘 알겠지만…….”

“너도…… 마녀니?”

순진무구하기 그지없는 유정의 반응에 자윤은 당황했다. 말이 가로막힌 유성은 이마를 짚었다. 그런 반응이 익숙한 듯 뵀다. 자윤은 눈을 내리깔고 머리를 굴렸다. 뭐야, 설마…… 심령동호회나 오컬트 동호회 사람인가? 밥알을 깔짝대던 자윤은 곧 PC방에서 얻은 기사 하나를 떠올렸다.

‘샛별처럼 나타난 다크 판타지 작가 노유정… 차기작은 언제 나오나?’ 같은 기사였다. 자윤도 책을 즐겨 읽긴 했지만 판타지 쪽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본인부터 인체실험을 통해 태어난 마녀─혹은 초능력자─였기 때문에, 판타지는 오히려 자윤에게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애초에 소설에 잘 집중하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노유정 작가님 아니세요?”

유성이 이제야 알아봤냐는 눈빛으로 팔짱을 꼈다. 아니 본인도 아무 소리 안 하는데 그쪽이 왜 그러시는지? 자윤은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거렸다. 자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는지 유성이 크흠, 하고 소리를 내고 몸을 돌렸다.

“맞구나. 아, 나는 또 누구신가 했네. 제가 요즘 뉴스를 잘 안 봐서요, 하핫.”

“그…… 알아봐 줘서 고마워.”

“그나저나 마녀, 라고 하신 건 무슨 뜻이세요?”

“아, 그게.”

자윤은 이야기를 들으며 부엌의 서랍을 손가락을 까닥여 열었다. 안에는 수많은 조리 도구가 있었지만, 자윤이 찾는 물건은 분명했다. 식칼이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순간 유성이 차가운 눈으로 자윤을 바라봤다. 자윤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유정이 둘 사이에 돌연 흐른 날카로운 기류에 혼란스러워하는 찰나, 유정은 자신의 목전까지 온 칼 몇 개를 보고 당황했다. 그리고 유성이 그 칼을 막기 위해 칼을 붙잡고 있었다. 유정은 조금 전까지 식탁에 칼이 없었던 것을 떠올렸고, 유성이 그 칼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자윤이 어떤 수를 써서 칼을 공중에 뜨게 한 것이란 걸 눈치챘다. 유성에게는 그런 능력이 전혀 없을뿐더러, 초능력자는 한 번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유정은 우선 최대한 침착하게 유성을 달랬다.

“유성 선배. 잠시만요.”

“유정아. 내가 다 이해했지만, 이건 못하겠어. 이봐, 너. 유정이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가는 가만 안 둬.”

“안 건드렸는데. 아직.”

“지금 말장난하자는 건가? 네가 누군지는 네가 말하지 않아도 금방 알아낼 수 있어.”

“아, 경찰이신가 혹시. 방 나오다가 경찰증 봤거든요. 근데 작가님이 다치는 게 더 빠를까, 아니면 당신이 내가 누군지 알아내는 게 더 빠를까?”

이를 가는 유성을 보고 유정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염력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무술을 잘하는 유성도 크게 당할 수 있었고, 변신해서 싸운다 해도 밀릴지도 몰랐다. 가장 큰 문제는 단연 메테오 드라이버와 메테오 스위치가 유성의 곁에 없다는 점이었다. 유정은 무엇보다도 자신 때문에 유성이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유정은 고개를 돌려 자윤과 눈을 마주쳤다.

“나도 마녀라고 한 게 혹시 너를 불쾌하게 했니?”

“글쎄요?”

“……이건, 네가 한 거지?”

유정이 천장에 보이지 않는 실로 매달린 듯 공중에 뜬 칼을 흘끔거렸다. 식칼의 날에 유정의 얼굴이 비쳤다. 자윤은 손을 모아 턱을 받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제가 한 거예요.”

“유정아. 더 이야기할 것도 없어. 이 녀석은 널…….”

“유성 선배. 진정하세요. 저를… 해치려는 것 같진 않아요. 이 아이가요.”

“오호.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날 공격할 수 있었을 테니까. 유성 선배가 알아차리기 전에.”

유성은 칼을 없애보려 잡아당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윤은 낑낑거리는 유성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안 되지. 본사에서 자랑하던 2세대 베테랑 부대도 자윤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런데 능력도 없는 범인(凡人)이 자윤을 이길 리 만무했다.

“만약…… 제가 지금 간을 보는 거라면요?”

“내 생각에는 너는 지금 날 시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야?”

자윤은 움찔했다. 확실히 이 둘을 공격할 의도는 없긴 했다. 조금 골려주고 싶을 뿐이었는데. 다혈질로 보이는 유성을 다루는 것부터 시작해서, 우습게 볼 사람은 아니었다.

“제가 어떤 걸 시험하는 거 같은데요?”

“내가 마녀라고 불리던 이유가 뭔지를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지금 와서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기는 좀 부끄럽지만.”

유정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다. 자윤이 생각했던 것과 유정이 말한 진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정은 오컬트 마니아였고, 심령 세계에 관심이 많던 학생이었다. 또한, 유정은 남들과 다르게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감각, 영감(靈感)이 열려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사람들을 멀리하고 오컬트에 빠지게 되었다. 유정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이에게 마녀라 불리었고, 본인도 마녀라 자칭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쁜 단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마녀와 닮은 나도, 그런 나도 나니까. 그리고 동화에는 착한 마녀도 있잖아?”

“작가님은 그렇겠죠. 하지만 제가 사람을 죽이는 나쁜 마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너무 비꼬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자윤은 순수하게 궁금한 거였으니 상관없다는 식으로 자신을 달랬다. 유정은 자신을 둘러싼 식칼 더미에 익숙해진 것인지 두려운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자윤의 눈을 들여다 봤다. 투명하면서도 까만 눈이었다. 자윤은 유정의 눈동자를 통해 자신을 다시금 바라봤다.

“확실히 사람을 죽이는 건, 악한 행동이라고 생각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용서받을 수도 없고.”

유성이 유정을 바라봤다. 그리고 유정의 시선은 여전히 자윤에게 향했다. 그것만은 자명한 사실이라는 듯.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널 이 자리에서 선하다 악하다 말할 수는 없어. 나는 네 극히 일부분만을 알고 있으니까. …모든 마녀가 불에 타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이게 내 대답이야.”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끝에 가서 유정이 작게 중얼거렸다. 자윤은 유정을 응시하다가 칼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유성이 숨을 몰아쉬었다. 유정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두 사람은 안심할 수 있었다.

“뭐, 괜찮은 대답이네요. 그 정도면. 그래도 이름은 알려드리지 않을 거예요.”

유성과 유정은 자윤을 돌아봤다. 자윤은 그 또래 나이대의 아이들처럼 밝게 웃었다. 이제야 마녀가 아닌 ‘구자윤’으로서의 자신이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에게 이름을 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은 아니었다. 자윤은 여전히 둘에게 헤프닝으로 남기를 원했다. 유정에게 답을 들었을 때, 그러한 생각은 더욱 커졌다. 둘은 유정이 말했던 대로 ‘마녀의 시험’을 통과한 셈이었다.

“밥, 맛있었어요. 근데 다음번엔 간을 좀 봐가면서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어? 짰어?”

“김치찌개요. 다음에는 같은 분량을 넣고 끓일 때 소금을 두 스푼 덜 넣으세요. 그럼 될걸요? 저도 집에서 집안일 해봐서 다 알아요. 그나저나 작가님 진짜 착하시네. 조금 짰을 텐데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이야.”

자윤이 유성을 흘끔 쳐다봤다. 유성은 자윤의 눈치를 보며 김치찌개를 한 입 맛보더니 숟가락을 내려놨다. 국물만 마시니 좀 짠 모양이었다.

“뭐, 뭐…… 그건 내가 긴장을 해서.”

“짠 거 몸에 안 좋대요. 앞으로는 작가님 건강 생각해서 덜 짜게 요리하시는 게 좋을걸요?”

유성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정은 그런 유성을 보다가 살짝 미소지었다.

“맛있다는 말은 진심이었어요.”

“그래? 봐. 유정이가 맛있…….”

“좀 짭짤했지만요.”

“…….”

“거봐요. 짜댔잖아요.”

자윤이 이죽거리며 마지막 숟갈을 떴다. 유성은 턱을 괴고 끙,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릇은 자윤이 치웠다. 설거지도 자윤이 했다. 유정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으나, 자윤은 그냥 치료해준 것과 밥을 해준 게 고마워서 하는 거라고 생각해달라 말했다. 그 말에 유성과 유정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자윤은 익숙하게 장갑을 끼고 물을 틀었다.

집을 떠나기 전 대부분의 집안일은 자윤이 맡았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자윤이 자처했다. 부모님의 몸이 편치 않기도 했고, 설거지할 때만큼은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씻기는 것 같아서였다. 자윤은 좋은 딸이 되고 싶었지만, 그 길에서 벗어나고야 말았다. 운명이라는 길에 의해서.

물소리가 오늘따라 크게 들렸다. 자윤은 열심히 식기와 냄비에 묻은 찌꺼기와 음식물을 닦아내다가 고개를 돌렸다. 유성과 유정이 도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손짓과 입 모양, 그리고 얼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에서 자윤은 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평온하고 행복한 분위기 속에서 자리를 지키는 것. 둘을 바라보다가 다시 싱크대로 시선을 돌렸다. 얼룩은 금방 씻겨나갔다. 닦이지 않을 것만 같은 얼룩도 머지않아 지워질 것이다. 자윤은 오랜만에 한 것치고는 금방 설거지를 마쳤다. 장갑을 있던 자리에 두고 손등으로 땀을 훔쳤다.

“미안해서 어떡해. 과자라도 조금 먹고 갈래? 차는 금방 내올게. 잠시만.”

자윤이 말릴 틈도 없이 유정이 새 찻잔을 꺼내왔다. 유성은 자윤에게 잠자코 앉으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얼른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 자윤은 입을 삐죽댔다. 그러나 여기서 그대로 나가버리면 유정이 쫓아올 것만 같아서 자윤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유정은 버터 쿠키 몇 개와 차를 내왔다.

“고집이 센 줄로만 알았는데.”

유성이 웃으며 말하자 자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고집이 세다는 거예요? 짐짓 앙칼진 반응을 보이자 유성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여기서 고집 제일 센 사람은 따로 있지.”

“저 여기 있거든요. 지금 제 흉보는 거예요?”

“흉본 적은 없는데.”

유성이 혀를 삐죽 내밀었다. 유정은 눈을 찌푸리며 잔과 그릇을 내려놓았다. 자윤은 말없이 차를 마셨다. 유정이 뜨거우니 조심하라고 했지만, 자윤에게 차는 그리 뜨겁지 않았다. 홍차는 씁쓸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꽤 비싼 찻잎으로 우려낸 듯 고급스러운 향도 났다. 자윤은 쿠키 몇 개를 집어먹으면서 차를 빠른 속도로 마셨다.

“……그렇지. 이것도 좀 가져가.”

유정이 뭔가를 또 내밀자 자윤은 슬슬 유정의 친절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이 아니었는데, 자윤은 유정이 준 꾸러미 안을 훔쳐봤다. 과자나 통조림 같이 그나마 오래 두고 벌써 몇 시간이나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버렸다. ‘허비’가 아니었던 게 그나마 다행인가. 유정은 차를 마시다가 자윤을 보고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졸린 눈으로 말했다.

“안녕. 만나서 즐거웠어.”

 

 

자윤은 잔과 그릇을 정리해두고 집을 나섰다. 한참을 걷다가 뒤돌자, 유성과 유정이 살던 아파트가 저 멀리 흐릿하게 보였다. 아마 지금쯤이면 테이블에 고개를 대고 앉은 채로 낮잠을 자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소파에라도 눕혀주고 갈 걸 그랬나. 고민하다가 코웃음을 쳤다.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것까지 챙겨줄 일인가. 자윤은 크게 웃었고, 거리를 걷던 사람 몇이 그런 자윤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지나갔다. 자윤에게 오랜 관심을 보이는 이는 결코, 많지 않았다. 그 몇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자윤은 웃기를 멈췄다.

만나서 즐거웠다고 말하던 유정의 얼굴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던 유성의 눈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가방을 고쳐 매고 자윤은 발길을 옮겼다. 낯선 이에게서 자신을 다시 찾았다. 이제 그런 자신의 모습을 추억으로 내버려 두고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설 차례였다. 목적지는 분명했다. 길도 분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정아. 유정아?”

유성이 등을 토닥이자 유정은 눈을 깜빡이며 몸을 일으켰다. 오래 엎드려 있던 탓인지 허리가 아팠다. 어떻게 눈치챈 것인지 유성은 유정의 뒤에 가서 허리와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유정은 아픔을 꾹 참으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자윤은 없었다. 역시, 갔구나. 유정은 한숨을 뱉어냈다.

“맞아. 찻잔이랑 쿠키 남은 거, 그 애가 다 치우고 갔더라.”

유성의 말대로 테이블은 아침을 먹기 전처럼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선배. 저희 얼마나 잤어요?”

“한 다섯…… 시간 잔 것 같아. 녀석, 도대체 수면제를 얼마나 탄 거야.”

유성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도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수면제를 탄 건 알면서도 먹어줬지만, 이 정도로 오래 재우면 어떻게 하냐고 투덜거렸다. 그러면서 유정을 일으켰다.

“뻐근하지? 마사지 좀 해줄게. 저녁 먹고 마감해야 하잖아.”

“그럼…… 부탁드릴게요.”

“아, 그리고. 이거 그 애가 남긴 것 같은데 볼래?”

유성이 포스트잇 한 장을 내밀었다. 포스트잇에는 ‘언젠가 다시 만나요. 마녀 언니.’라고 쓰였다. 구석에는 작게 ‘내 이름은 구자윤이에요.’라는 문장도 있었다. 자윤, 자윤. 유정은 작게 중얼거렸다. 영 현실 세계의 아이 같지 않던 그 아이가, 자윤이, 이제야 유정에게 다가왔다. 유성은 유정과 눈높이를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름, 알려주기 싫어하더니 결국엔 알려줬네.”

“…다시, 만날 수 있겠죠?”

“아마도. 아니 분명히 만날 수 있을 거야.”

그 아이가 설령 그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사람일지라도. 그렇다 해도 유정은 자윤에게 자신과 유성이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했다. 그래서 언젠가 ‘마녀’가 아니라 ‘구자윤’으로 돌아올 용기가 생긴다면, 다시 만나고 싶었다.

“네. 그럴 거예요.”

유정은 웃으며 유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성은 유정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창을 통해 붉은 노을빛이 들어와 두 사람을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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