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특촬 HL 1일 전력'에 올라온 '첫사랑'을 주제로 쓴 글입니다. 가면라이더 포제의 일부 스포일러와 캐릭터 붕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첫사랑은 이룰 수 없다. 그건 사랑의 법칙이고, 어쩌면 세상의 진리일지도 모른다. 처음은 낯설고, 어설프며, 서투른 법이니까. 특히 사람 간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랑하기에 사랑한다며 깊게 상처입히고, 처음이기에 ‘처음’이라고 변명할 수 있다. 처음이라는 말은 참으로 간사하고 그래서 풋풋한 말이다. 그렇게 변명하기만 한다면, 오해의 골은 깊어지고 결국에는 ‘처음’이라는 단어만이 쓰라린 환상 혹은 잔상처럼 남아버려서……」
“정말, 그렇게 생각해?”
책상에 놓인 액자를 까딱까딱 움직이며 류세이가 물었다. 바삐 손가락을 움직여 타자를 하던 토모코가 고개를 들어 류세이를 바라봤다. 토모코가 류세이를 바라보자, 류세이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류세이의 검지는 여전히 액자 틀에 올려져 있었다. 토모코의 시선을 의식한 듯 검지는 힘없이 툭, 하고 내려와 책상을 두어 번 두드렸다.
“류세이 선배.”
“응.”
“정신 사나워요.”
“정신 사나워지라고 한 건데? 두 시간 동안이나 마감만 하는 거 힘들지 않아? 나랑 커피도 마시고 디저트도…….”
“미안하지만, 마감이 급해서 한 시간만 더 참아주셔야겠네요. 커피는 주시면 감사하게 마실게요. 디저트도요.”
류세이가 입술을 비죽거리며 금방 커피와 망고 무스 케이크를 가져왔다. 토모코는 포크로 작게 케이크를 잘라 음미하더니 으음,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한 번 더 케이크를 잘라─이번에는 좀 더 큰 크기였다.─류세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조금 빈정이 상한 듯 풀이 죽은 얼굴을 하던 류세이의 낯이 금방 폈다.
“맛있다.”
“그렇죠? 고마워요. 제가 좋아하는 걸 사다 주셔서.”
“하지만 토모코는 나보다 마감이 좋잖아? 나랑 마감 중에 뭐가 더 좋아? 응?”
칭얼거리는 투로 류세이가 묻자, 토모코는 웃으며 류세이에게 가까이 오라고 했다. 류세이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슬금슬금 오자, 토모코는 기다렸다는 듯 양손으로 류세이의 뺨을 착, 소리 나게 감쌌다.
“악!”
“우리 귀여운 류세이 선배. 제가 마감에만 신경 써서 질투 났어요?”
“응.”
“어라. 바로 인정하실 줄은 몰랐는데.”
“그 정도는 나도 인정한다고. 왜냐하면 나는 토모코가 좋으니까. 그리고 토모코가 지금 쓰는 내용, 첫사랑은 이룰 수 없다는 내용, 진심은 아니지?”
“제가 어떻게 결론지을지는 아시는 거예요?”
“몰라. 그래도…… 난 첫사랑을 이뤘는걸?”
흐음, 하고 토모코가 진중한 얼굴로 있다가 손을 떼고는 액자를 바라봤다. 데이트 때 찍은 사진, 그리고 학생일 때 찍은 사진 두 개가 나란히 한 액자 안에 들어있었다. 첫사랑이라. 곱씹고 나니 웃음이 번졌다. 사진에서 눈을 뗀 토모코는 고개를 들어 류세이를 올려다봤다. 다소 서운해한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귀엽다. 손을 모아 턱 밑에 받치면서 토모코는 웃음 지었다. 어찌 저렇게 사람이 날이 갈수록 귀여워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 *
그렇다. 사쿠타 류세이는 토모코에게 첫사랑이었다. 사람들을 싫어하고 기피하던 토모코에게 찾아온 첫 번째 봄이 바로 류세이였다. 그래서 토모코는 환절기 감기를 피하지 못했다. 류세이를 볼 때마다 편도선이 부은 것처럼 목이 간질거렸고, 알레르기라도 인 것처럼 눈물이 났다. 여기저기가 가려웠고,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오리무중이었다. 종국에는 참지 못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재채기처럼 내뱉었다.
그리고 그 고백을 들은 류세이의 표정은 당황감 그 자체였다.
“물론 받아달라는 건 아니에요. 거절한다고 저주하지도 않을게요. 거절, 해도 괜찮으니까 그냥, 전처럼 지낼 수만 있게 해주세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켜만 보겠다고. 원한다면 사랑하는 걸 그만두고 당신을 우정으로만 대하겠다고. 토모코는 주문을 읊는 것처럼 쉬지 않고 말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이미 당신이 날 거절할 걸 알고 있으니, 내가 괜한 기대를 하지 않도록 ‘협조’해달라고. 토모코는 코끝이 시큰해졌지만 울음을 꾹 참아내고, 류세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류세이는 토모코의 기대를 저버렸다.
“거절할 생각, 딱히 없었는데?”
“네?”
“…그러니까 사귀, 자는 이야기인데. 혹시 싫어?”
“아, 아, 아니요! 좋아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외쳤다. 류세이는 웃음을 참으며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그제야 그늘에 가려진 류세이의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흐르자, 해가 움직였고 류세이가 고백을 받았을 즈음에는 해가 류세이의 머리 바로 위에 있었다. 토모코는 눈부신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그것이 토모코가 첫사랑을 이루고 처음 내보인 자세였다.
* * *
싸우기도 엄청 싸웠지. 본인은 매일 다친 걸 숨기느라 바쁜 주제에 자신은 또 과보호하는 것 때문에 몇 번은 류세이를 때리기─물론, 베개로 때렸지만.─까지 했다. 그뿐인가. 인기 많고 잘생긴 애인 때문에 질투는 얼마나 했던가. 괜히 속 좁은 게 아닌가 싶어서 꽁하니 있으면, 득달같이 달래주려고 애쓰던 모습에 화가 가라앉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결코 순탄치 않은 사랑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잘 버텼다.
아니 버텼다기보다 같이 걸어왔다고 하는 쪽이 더 맞나? 버텼다는 말은 너무 슬프니까. 타자를 이어가던 토모코는 손등으로 턱을 괴며 바로 앞에 앉은 류세이를 바라봤다. 류세이는 책상도 없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흘낏 토모코를 넘봤다.
“책 재미있어요?”
“응. 꽤 재밌네. 토모코가 추천할만한 책 같아.”
거-짓말. 토모코는 입 모양으로 말했지만, 류세이는 본 체도 하지 않으면서도 입꼬리를 올렸다. 책 같은 건 처음부터 읽지 않았으면서. 토모코는 노트북을 닫아 옆으로 치우고 엄지와 검지로 류세이의 입꼬리 위에 얹는 시늉을 했다. 토모코의 손이 ‘V’자를 그리며 류세이의 얼굴을 크게 웃는 얼굴로 만들었다.
“내 얼굴이 그렇게 좋아?”
“류세이 선배는 이마에도 눈이 달렸나 봐요.”
“이마에만 달렸을까. 등에도 달리고 어깨에도 달렸지.”
그 말에 토모코가 얼른 손을 뗐다. 류세이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더니, 책을 덮어 토모코의 책상 위에 올렸다.
“왜. 눈이 많은 남자는 싫어?”
“아니요. 좋아해요.”
“그런데 반응이 왜 그래? 섭섭한데?”
“그게 아니라…….”
“신기해서? 분명 네 눈에 보이는 내 눈은 두 개인데 여러 개라고 말해서?”
토모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류세이는 의자를 끌어 책상 쪽으로 더 다가가더니 책상에 엎드렸다. 그러게, 하고 류세이가 중얼거렸다.
“내 신경이 온통 거기로 가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옛날부터, 쭉.”
* * *
귀신처럼 새벽 거리를 떠돈 적이 있다. 화가 날 때면, 슬플 때면, 화가 난지도 슬픈지도 모르는 때면 거리를 걸었다. 가로등도 꺼진 어슴푸레한 거리를 걸어도 마음은 갑갑하기만 했다. 다른 나라의 어느 부족민들은 화가 나면 풀릴 때까지 걷고는 했는데, 아무리 걸어도 다리가 아프기만 했다. 그럴 때면 토모코는 거리 한복판에 주저앉아 울지도 웃지도 못했고, 양손을 기도하듯 모았다.
날 구해주세요. 구원해주세요. 그럴 사람을 내게 보내주지 않을 거라면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보내주세요. 울면 선물이 오지 않을까 봐 토모코는 입술을 세게 깨물고 한참 그렇게 주저앉은 채로 시간을 보냈다.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간다고 해도, 내 고독이 사라질까. 이곳이 아닌 곳은 또 어딜까. 다른 지역? 아니면 다른 나라?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행성?
만약 그곳에도 있을 자리가 없다면.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토모코는 일어서 펑펑 울었다. 아주 서럽게 울면서 걸었다. 화장을 하지 않은 탓에 검은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토모코는 걸었다. 계속. 그리고 계속. 돌아갈 기운만이 겨우 남을 때까지.
* * *
“그래서 오늘치 마감은 끝?”
“네.”
“세 시간이나 앉아서 마감하는 거 힘들지 않아?”
“제가 보기에는 몇 시간 동안 용의자 쫓는 게 더 힘들어 보이는데. 제가 그렇게 걱정되세요?”
“그럼. 평생 걱정될걸.”
“정말이지. 그러다가 예쁜 얼굴에 주름 생기겠어요. 그럼 잘 기다려줬으니 상을 줘야겠죠?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요? 집에서? 아니면 밖에서?”
토모코가 책상을 짚고 일어서자, 류세이는 기다렸다는 듯 자기 의자를 정리하고 토모코 옆에 붙었다. 흠흠. 류세이가 헛기침을 했다.
“토모코 좋을 대로 해. 난 둘 다 좋아. 음, 밥은 매일 같이 먹으니까…… 우리 영화 보자. 영화 못 본 지 꽤 되지 않았어?”
“그랬죠? 저희 둘 다 바빴으니까. 그럼 밥 먹고 영화 봐요.”
“…응.”
“오구오구, 그렇게 좋았어요?”
“나, 나 애 아니니까 그런 말은 좀…….”
류세이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류세이는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며 시선을 피했다. 토모코는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류세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업실에서 나갔다.
* * *
처음은 많은 것을 정한다. 그 사람의 운명을 정하기도 하고, 비틀기도 한다. 우리는 양끝단에 있는 것들에 신경을 쓰느라 간혹 중간에 있는 것들을 놓치기도 한다. 그러나 처음이 우리의 뇌리에 박혀 오랜 추억을 남기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매우 자명한 사실이기도 하다.
사실 당신과 처음 만난 날, 나는 죽었다. 당신을 보고 숨을 쉬는 법을 잊어 이제까지 잘못된 방법으로 숨 쉰 탓에 내 수명이 달라진 걸지도 모른다. 당신의 호흡에 내 호흡을 맞추려 무던히도 애를 썼음을, 당신은 알까. 안다면 당신은 사과할까. 아니면 당신의 호흡을 불어넣어주려 내게 입맞출까? 나는 답을 알기 위해 영원히 묻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도, 당신이 처음이란 사실도, 어쩌면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당신과 내 사이에 연결된 붉은 실이 사실은 여러 개의 실로 얽힌 실타래라는 사실은, 나만이 알고 있다. 그 실을 올바르게 풀거나 끊는 사람은 나일 것이고, 또 나여야만 한다. 그러니 나는 내가 쓴 첫문장을 마음속에서 수정할 예정이다.
그러니 더는 첫사랑을 미룰 수 없다고.